오르막길을 오르는 다리 위로 얇은 스커트자락이 거슬린다. 오늘 괜히 맥시원피스를 입었다고 생각하며 엔은 머리카락을 부산스레 정리해 귀 뒤로 넘겼다. 양쪽 어깨에 매달린 무거운 가방 때문에 어깨가 아파왔지만 강의실에 도착하려면 5분정도는 더 걸어야했다. 필시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거울을 보면 어깨에 얕은 피멍이 들었을 것이다.
엔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가방끈을 고쳐 맸다. 크로스로 매고 있는 가방끈 때문에 자켓이 접혀 구겨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자켓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겸사겸사 오른쪽 어깨에 맨 캔버스백도 고쳐 맸다. 가방끈을 고쳐 매며 손끝으로 느껴지는 거친 광목천의 질감에 손끝이 예민해진다. 가방끈을 고쳐 매느라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놀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종아리를 넘어선 긴 치맛자락은 다리에 거슬려왔다.
아직은 싸늘한 초봄의 공기가 코끝을 아리게 했다. 시려오는 코끝에 엔은 한없이 기분이 축 쳐지는 느낌을 자각했다. 이 쳐지는 기분은 오늘 저녁 보게 된 어깨의 피멍도 아니었고 걷는 것은 소심하게 방해하고자하는 긴 스커트자락도 아니었다. 개강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쏟아지는 과제의 양에 오늘까지 끝내야하는 과제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찌하랴 끝 맞춰야하는 건 정해진 일이었고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어폰으로부터 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엔은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더 이상 미루지 말자고 생각했다. 오늘도 열심히 하루를 보내자. 엔은 강의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 빨리 했다.
하지만 그 발걸음을 오래가지 않아 멈춰야만 했다. 엔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파들거렸다.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인지 너무 놀라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강의실로 향하는 기다란 캠퍼스의 길의 도로의 건너편. 그 곳에서 언뜻 보였던 인영에 엔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했다. 흘긋 보고 무심코 지나칠 뻔한 인영에 엔은 심장이 철렁했다. 저도 모르게 바들바들 떨려오는 손이 스커트자락을 꽉 쥐었다. 엔은 혼란스러운 심정속에서도 스커트자락에 구겨진 자국이 남을까 실없는 생각마저 했다.
격한 감정에 메여오는 목구멍으로 억지로 침을 삼켰다.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조심스레 돌려 건너편 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엔은 채 생각이 먼저 나기도 전에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급작스레 달리기 시작한 탓에 어깨에서 떨어져 나간 캔버스백이 바닥으로 떨어져 소리를 며 떨어진 나무틀과 함께 색색의 실뭉치들이 도로의 이곳저곳으로 굴러갔지만 엔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조차 않았다.
“곤!”
벅차오르는 감정에 눈물이 솟아올라 시야가 흐릿해졌다. 하지만 엔은 자신이 뛰어가는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겨우 이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 건너편인데도 엔은 그에게 달려가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한 발짝 한 발짝 뛰는 그 매 순간이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다. 더, 더 빨리, 저것이 환영이라면 사라지기 전에! 진실이라면 어서 더 빨리! 귓가에 울리는 피아노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오는 심장소리에 엔은 더욱 벅차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엔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겼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꽉 안았다. 따스한 온기와 햇볕의 마른 냄새가 났다. 살짝 풀냄새도 나는 거 같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턱 아래로 흘러 넘쳤다. 환영이 아니었다. 진실로 이 자리에 존재했다. 결단콘 이생에는 한 번도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더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 자리에 존재했다. 아, 이 얼마나 행복한 기적인가! 엔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곤, 곤, 곤!”
그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 세상의 아름다운 모든 미사여구를 붙여 그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감정을 이기지 못한 서러움이 가득한 울음 소리였다.
곤은 엔이 자신에게 뛰어 올 때부터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그저 엔이 어서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앞만 보며 걷는 그녀의 모습을 눈에 새기며 조심스레 그녀가 알아차릴 때까지 조용히 그녀와 보폭을 맞춰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언제쯤 알아차릴까 기대를 하며 걸을 때의 기분은 비록 도로를 사이에 낀 거리였지만 그녀와 산책을 하는 기분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듯 시시각각변하는 그녀의 표정에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챈 듯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놀란 기색으로 천천히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 때 가슴이 떨려왔다. 실로 이보다 기쁠 순 없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그녀와 만나게 되었다. 처음으로 그녀와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다급하게 자신에게 달려오는 그녀의 입에서는 곤의 이름이 나왔다. 아, 그녀는 내 이름도 알고 있구나. 씁쓰레한 감각에 눈썹이 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곧 그녀가 자신의 품에 안겨들어 느껴지는 온기에 그녀를 꽉 안아주었다. 자신에게 매달려 울음을 토해내는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워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그녀를 달랬다.
“쉬, 괜찮아. 아무데도 가지 않아.”
곤의 잔잔한 목소리와 그녀의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그녀의 울음이 점점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곤은 그녀의 뺨을 매만져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 아직도 눈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세상 모든 것이 서러워 보이는 얼굴로 그녀는 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곤.”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얼마나 고운지, 곤은 그녀의 눈가를 다시 한 번 닦아주며 그녀의 볼에 짧게 입맞춤을 했다. 절로 입가가 올라가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곤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갈래?”
곤은 엔에게 어디로 가는 것인지, 어떻게 가는 것인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엔은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드디어 곤과 만났다. 그것만으로도 엔은 너무나 행복했다. 엔은 진심으로 기쁜 듯이 미소를 지었다. 너무 기뻐서 웃음이 멈추지 않을 거 같았다. 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곤이 내민 손을 잡았다.